카르멘&호세[카르멘]
마농레스크&슈발리에[마농레스코]
마르그리트&아르망[춘희]



소설은 사회상을 반영하기도 하고, 때로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계몽적인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 카르멘과 마농 레스코, 마그리트. 이 소설속의 주인공들은 각기 개성이 강한 캐릭터들이며, 독특한 사랑을 경험하는데 그들의 경험에서 비슷한 점들을 몇몇 찾을 수 있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당시의 이상적으로 생각한 사랑의 방식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다.
그들은 각각 어떤 사랑을 하였는가?

카르멘과 호세의 사랑은 다소 격정적이다. 구애에 있어서도 적극성을 띄고 호세에게 접근하였고 "집시"다운 자유로움이 있어 사랑이 끝났을 때는 미련 없이 자유롭게 떠난다. 그녀에게 사랑은 일종의 유희이며 자신이 아직 매력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도구다. 반면에 호세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사랑하는 이를 지켜주고자 하는 면은 다른 두 소설의 남주인공들에 비해 뛰어나 보이지만 결국 그의 애정은 비뚤어진 집착의 형태로 변하게 된다. 그가 자발적으로 치룬 카르멘에 대한 희생은 그의 소유욕이 정당한거라 스스로 확신시켰으며 그의 집착에도 불구하고 좌절되었을 때는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는 카르멘을 소유할 수 없으니 차라리 "남의 것"도 될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그의 사랑은 세상 최고의 가치이며 그의 흉악한 범죄마저 정당화시킬 수 있는 이유였다.
이런 호세의 비도덕적이며 자기합리화를 시키는 생각은 마농 레스코와 슈발리에의 사랑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마농 레스코와 슈발리에의 관계는 흡사 거리의 여자와 포주의 관계처럼 보이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강제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마농 레스코는 단지 사치를 위하여 다른 사람의 정부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명목상으로는 사회생활이 힘들 슈발리에를 위해 자신이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마농은 자신이 편하기 위해 선택한 일인 것이며 다른 사람을 속이는 일에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마농에게 슈발리에는, 입으로는 사랑이라 말하지만, 그녀만을 사랑한다는 슈발리에는 그녀가 언제든지 돌아가더라도 받아줄 최후의 1인이었으며 보호자였다.
슈발리에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도 상대방이 물질적인 면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최선이기 때문에 일단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에 대한 가책이 없었으며 ,필요할 때마다 거짓말로 위기 모면하는 것처럼 사랑도 또한 그들에겐 하나의 면죄부였을 뿐이다.
그들의 사랑은 물질적 풍요를 위해서는 서로 이용해도 괜찮은……. 주변 사람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이며 무책임하며 비도덕적인 방법으로 유지되어왔으며 ,특히 아농의 행동을 합리화 시키는 슈발리에는 호세를 , 희생하는 듯하지만 마음은 이미 자신도 모른 채 변하고 있는 마농은, 쉽게 사랑이 흔들리는 카르멘 그리고 마농, 자신이 선택한 그녀가 말하는 "희생"을 하는 점은 춘희의 마르그리트의 모습이 조금씩 섞여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마르그리트는 어떤 형태의 사랑을 하였는가?
그녀는 처음에는 카르멘처럼 자유스럽고 즉흥적인 형태의 사랑을 마농이 택한 형식을 빌어 이용하던 여성이였다. 그녀도 카르멘만큼이나 험난한 삶을 살았었는지는 모른다. 사교계라는것이 온갖 비리의 온상이였으니 그 안에 속하던 마르그리트 역시 사회에 의해 순수함을 잃어버리게 된것이였다. 그러나 이런 그녀에게 생애 마지막 사랑이 다가온다. 그것이 바로 아르망과의 사랑이다.
아르망은 호세처럼 한눈을 팔지 않는 오직 한 여자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호세에겐 소유욕과 집착이 더 컸지만. 그는 그가 마르그리트에게 말한 순수한 사랑을 나누려 한다. 하지만 이런 사랑에만 목적을 둔 그는 생활에는 능력이 없다. 마치 마농의 연인 슈발리에처럼 경제적으로는 무책임하다는 것이며 이런 위기감이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기 전에 모든걸 뒤처리하는 것은 마르그리트의 몫이였다.
이 둘의 관계는 흡사 어머니와 아들같은 애정어린 보살핌으로 보이기 까지 한다. 특히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모든걸 포기하는 희생을 마르그리트는 아르망을 위해 사랑 하지 않는척 꾸며대는 모습에서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던지는 모습은 아가페적이다가로까지 할 수 있겠다.
또한 사랑이 나쁜 가치관까지 고쳐, 타락의 길을 돌아 설 수 있게 하는 묘약으로 표현하였다.
아르망은 호세와 슈발리에처럼 자신의 가족과 지위를 포기하면서까지 열정을 받쳤지만 이 모든 자신의 사랑이 결국 배반으로 이어졌다는 오해를 하게 된다. 그도 역시 질투에 불탔지만 호세와 같은 소유욕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이타적이었던 마르그리트의 선택과는 달리 그는 역시 그자신을 더욱 사랑했으며 그래서 자신의 믿음에 대한 절망을 더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남자주인공들보다는 조금 더 나은점이 있다면 그는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가족에게 받아들이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하였다는 점이다. 비록 유치한 자기감상적인 면이 많아 보였지만 말이다. 마치 몽상가처럼...

[현남 덧]이 세 소설 주인공들의 사랑은 사회에서 용인되는 신분과 사회에서 인정하지 않는 신분의 차이 속에서 비현실적인 사랑이 그려지고 있다. 춘희에서의 소설책이나, 카르멘의 타로 카드는 소설의 전개에 대해 복선 역할을 하고 있다. 오해와 엇갈림 속의 극적 요소를 담고 있으면서 사회의 관념을 뛰어넘지 못하는 이들의 비극적 사랑을 그리고 있다.
세 소설 모두 여성의 물질적 욕망과 남성의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하는 순수한 사랑의 등장은 사랑의 의미를 춘희에서처럼 재발견 시키기도 하지만, 카르멘이나 마농에서처럼 그 의미를 변질, 퇴색시키기도 한다.
여성은 가난함 속에서 현실에 적응해 가는 적극적이고 생존을 위한 삶의 투쟁이요, 그것이 사랑이라며, 남성은 부유하고 평범한 환경 속에서 곱게 자라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같은 자기 중심적, 순진한 사랑을 하고 있다.
춘희에서의 사랑은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이타적인 아가페식 사랑이라면, 카르멘에서는 보다 자기 중심적인 프래그마식의 사랑이고, 마농에서의 사랑은 이기적인 마니아식의 사랑으로 그려지고 있다.
Posted by 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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